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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2020년도 온라인 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충남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어사 박문수 시리즈 중 다섯번째 ‘이인좌의 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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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나무위키

1728년 조선시대 영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다만 이 표현은 고려시대 무신정변(무신의 난)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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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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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인좌의 난(李麟佐ㅡ亂)은 조선 영조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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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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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李麟佐 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문수조선후기 호조참판,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분무공신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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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4/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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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조선 후기 – 우리역사넷

이 사료는 『영조실록』 1728년(영조 4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기사로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자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안성(安城)에서 반란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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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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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1728 – 우리역사넷

이인좌의 난.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대표 이미지. 감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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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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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 디지털천안문화대전

[정의]. 조선 후기 영조 즉위 직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연합하고 이인좌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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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eonan.grandculture.net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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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원인과 결과 – 네이버 블로그

이인좌의 난 원인과 결과. ​. ​. 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숙종(제19대 왕, 1661~1720, 재위 1674~1720)은 노론의 수장 이이명을 불러 독대한 후(정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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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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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위기극복 리더십 연구: ‘이인좌의 난’ 사례를 중심으로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15일부터 3월 28일까지 약 보름간 진행된 전국적인 반란으로,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영조 정권에게 큰 타격이자 도전이었다. 이인좌, 박필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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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0/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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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이란?…조선 후기 영조 즉위후 이인좌 등 소론(少論 …

드라마 `해치`가 갈수록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 하고 있는 가운데 `영조`와 `이인좌의 난`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4월 8일 방송된 SBS 월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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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bsm.net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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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이인좌의 난과 어사 박문수 – 미주중앙일보

영조의 즉위 전 이야기부터 그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국왕의 자리를 지키는 이야기를 담은 역사드라마 ‘대박’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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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eadaily.com

Date Published: 6/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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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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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인좌 의 난

  • Author: 혜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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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2.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ADjdswWfec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인좌의 난 날짜 1728년(영조 4) 3월 15일~3월 24일 장소 한반도 중부 일대. 결과 이인좌의 대패, 농민 학살. 교전국 이인좌 조선 조정 지휘관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오명항

기타

병력 7만 명 이상 오명항의 오군영 2300명, 기타 수천 명. 피해 규모 심각 불명

이인좌의 난(李麟佐ㅡ亂)은 조선 영조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하고,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영남)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명칭 [ 편집 ]

이인좌-정희량의 난(李麟佐ㅡ鄭希亮의 亂)이란 총대장 이인좌가 초기에 진압당했을 때 정희량이 이끌은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명칭이다.

배경 [ 편집 ]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박필현·심유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 편집 ]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해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大元首)라 칭하며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격문의 요지는 경종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흉악한 무리(즉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한 독살이고, 연잉군(영조)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군사들은 경종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상복과 같은 흰옷을 입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 · 총융사 김중기 ·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龍仁)에 퇴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조정에 고변해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영조가 정미환국을 하여 반군의 양반들을 회유하는 한편,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고작 3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이들은 2300명에 불과하였으나 숫자는 많으나 실질적인 무장들이 사라진 반란군을 손쉽게 학살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그 숫자도 그렇고, 반란군의 양반들이 회유되기 전의 지방군은 이를 제압하지 못하여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된다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1]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영향 [ 편집 ]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50여년에 걸쳐서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 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2]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금지는 사실상 130여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고 문헌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영조〉”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 [ 편집 ]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주 01)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 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주 02)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부터 박필현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갔다.

이에 경중(京中)에서는 이하(李河)·양명하(梁命夏)·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 안음인으로 나중에 希亮으로 개명)·나만치(羅萬致, 은진인)·조덕규(趙德奎, 여주인)·임서호(任瑞虎, 이천인)·정세윤(鄭世胤, 안성인)·이호(李昈, 진위인)·민원보(閔元普, 충주인)·이인좌(청주인)·신천영(申天永, 청주인)·김홍수(金弘壽, 상주인)·이일좌(李日佐, 과천인) 등이 가담하였다.

또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경종의 前妃 沈氏의 동생으로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의 발설과 결부시켜 흉언을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와 괘서사건이 일어났고, 또한 이들은 가정(家丁)·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募軍)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난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陽城人) 김중만(金重萬) 등이 각지의 취군(聚軍) 동태를 속속 고변하였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진위 땅에 있으면서 종사관 등과 더불어 진병(進兵)할 것을 의논하여 각기 그 이해를 개진하였다. ……(중략)……

안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적의 간첩 최섭(崔涉)이란 자를 붙잡아 힐문해 적의 정세 및 적장(賊將)의 성명을 알아내고 주머니 안을 조사해 이봉상(李鳳祥)의 패영(貝纓)을 찾아냈다. 잠시 후 앞산에 몇 개의 횃불이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오면서 포성과 함성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니 적병이 진을 침범했다고 후졸(候卒)이 급히 보고해 왔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장작불을 미처 피우지 못해 진 밖은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먹지 못한 군마(軍馬)가 반이 넘어 뭇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으나 오명항이 굳게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단지 진오(陣伍)를 정돈한 채 경솔하게 포를 쏘지 말고 적이 가까이 오면 비로소 쏘도록 신칙하였다. 그리고 죽을 준비해 사졸들을 먹이고 평소처럼 코를 고니, 진중이 거기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이튿날 새벽 진 밖의 100여 보 되는 곳에 적병의 인마(人馬)가 탄환에 맞아 죽고 버린 무기들이 보였다. 대개 적은 각 처의 토적(土賊) 및 청주진(淸州鎭)⋅목천(木川) 등 고을의 마병(馬兵)과 금어군(禁禦軍)으로서 정예한 자를 뽑아 장사치와 거지 차림을 하여 피난민 가운데 섞여 은밀히 안성(安城) 청룡산(靑龍山) 속에 모여 있었는데도 산 아래 촌락이 거의 적의 소굴이 되어 있어 누구 하나 와서 고하는 자가 없어 안성군에서는 아직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적의 첩자가 번번이 관군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적도들도 단지 대군(大軍)이 직산(稷山)으로 향한 줄만 알았지 진을 안성으로 옮긴 줄은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 안성군의 진(陣)인 줄 잘못 알았기 때문에 원근을 구별하지 못해 포(袍)와 화살을 어지러이 쏘았으나 다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군이 쏜 신기전(神機箭)을 보고서야 비로소 경영(京營)의 군사가 온 것을 알고 놀라고 겁에 질려 물러나 도망하니,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는 이때 대부분 도망해 흩어지고, 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박종원(朴宗元) 등은 4~5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룡산 속으로 물러가 둔을 치고 죽산(竹山)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대군도 적이 주둔한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날 아침에 교련관 권희학(權喜學)이 민제장(閔濟章)이 적의 첩자를 사로잡은 것을 보고는 곧 달래고 힐문해 비로소 적병이 산속 가지곡(加之谷) 대촌(大村) 속에 있는 것을 알았으니, 관군과 겨우 5리 남짓 떨어진 지점이었다. 오명항이 멀리서 그 지형을 바라보니, 청룡산 한 줄기가 수백 보(步) 정도로 길게 구부러져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3면을 둘러 안았는데, 50~60호의 마을이 그 안에 자리해 있었으며 전면은 평야였다.

즉시 중군(中軍) 박찬신(朴纘新)으로 하여금 보군(步軍) 3초(哨)와 마군(馬軍) 1초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경계하기를, “기(旗)를 눕히고 북소리를 내지 말며, 갑옷과 투구를 벗고 빨리 달려 나가되 보군 1초는 산 뒤쪽을 거쳐 먼저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고, 2초는 두 날개로 나누어 포를 쏘고 화전(火箭)을 쏘아 그 촌락을 불태우라. 그렇게 하면 그 형세로 보아 반드시 앞들로 도망해 나올 것이니, 이에 마군(馬軍)으로 짓밟으라” 하고, 또 민제만(閔濟萬)에게 명하기를, “안성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로 향해 의병(疑兵)을 만들어서 적의 도주로를 막으라” 하였는데, 전군(前軍)이 절제(節制)를 어기고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행군했으므로 적이 눈치 채고 군기와 집물(什物)을 버리고 급히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붉은 일산(日傘)을 세워 백기(白旗)로 지휘하니, 관군이 지형의 이로움을 뺏겨 올려다만 볼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권희학이 한 촌 할미를 붙잡아 위협해 적장 한 사람이 마을 가운데 있음을 알고는 이만빈(李萬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장사(將士)가 아닌가? 하찮은 적을 보고 겁을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만빈이 분연히 말하기를, “내 마땅히 죽으리라” 하고는 말에 오르면서 용사를 구하기를,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니, 중초군(中哨軍) 조태선(趙泰善) 등 50여 명이 따르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앞장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적장 박종원의 말이 사나워서 재갈을 물지 않으므로 지체하고 도는 사이에 관군이 이미 들이닥쳤다. 박종원이 소리치기를, “시간을 끌다가 목숨이 이에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는 칼을 뽑아들고 벗어나려 하였다. 조태선이 먼저 한 발을 쏘아 그 목을 맞히니, 박종원이 몇 걸음을 달려가다가 쓰러졌다. 이만빈이 말에서 내려 목을 베고 또 그의 군관 몇 사람을 베었다. 그리고 그 목을 깃대에 매달고 산 위로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서 기운이 빠지고, 또 궁포(弓砲)가 모두 밤비에 젖어 쓸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산꼭대기로 도망하여 올라갔는데, 그때 동북풍이 세게 불고 적은 서남쪽에 있어 관군이 바람을 타고 힘을 분발해 올라가니, 적은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하려다가 민제만의 의병(疑兵)을 보고는 다시 돌아 서쪽으로 가니 형세가 더욱 위축되어 기와 북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이 추격해 100여 명을 베었으며, 마병 임필위(林必偉)란 자는 적 1명을 사로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니, 보는 자들이 장하게 여겼다. 그들의 짐바리와 홍산(紅傘)⋅기치(旗幟) 등을 노획했다. 처음에 관군이 올려다보며 적을 공격하여, 적은 산 위에서 진퇴(進退)하며 유인하는 형상을 짓기도 했는데, 적과 관군이 모두 군사를 거두어 산을 내려온 후에는 막연하여 그 승부를 알 수가 없었다. 종사관 등이 해상(垓上)에 올라가 바라보고는 관군이 적에게 함몰되는가 싶어 매우 초조해 하니, 오명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적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정오가 채 못 되어 말을 달려 승첩을 알려 왔고, 포시(晡時)에 박찬신(朴纘新)이 고각(鼓角)을 울리며 깃대에다 적의 머리 여러 개를 매달고 오니, 군중에서 승전곡을 울리고 군사와 말이 기뻐 날뛰었다. 첩서(捷書)를 써서 박종원 등의 머리를 함에 담아 군관 신만(申漫)에게 주어 서울로 치보(馳報)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상하가 밤낮으로 초조하게 걱정하며 첩보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동북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왕의 군대에 이롭다” 했는데, 과연 크게 이겼던 것이다.

『영조실록』권16, 4년 3월 15일(계유)

이인좌의 난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각종 세금 부담과 지주층의 경제적 수탈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양역문제와 관련한 부담이 컸다. 당시 백성은 군역(軍役)을 부담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노인, 어린아이,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군포를 부담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들은 도적단이 되어 관아와 지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도적단은 전라도 정읍에서 100여 명이 창과 포를 들고 다니고, 우두머리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적지 않은 규모와 지휘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반 확대를 위해 상인, 승려, 유랑민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영덕(盈德)에서는 향리와 수령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에서는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정치상황도 불안하였다. 노론(老論)은 ‘정유독대’를 계기로 동궁(경종[조선](景宗))을 즉위시킨 다음, 연잉군(영조(英祖))을 세제로 책봉하는 당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노론이 동궁을 폐한다는 의혹을 진정시키면서, “효종(孝宗)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주상과 연잉군에게만 있다”는 왕대비의 언문 수교를 이용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노론 측의 움직임에 대해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이미 은퇴하였고,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은 노론으로 옮기는 등 세력이 약해진 소론(少論)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남인(南人) 역시 경신환국(庚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신사옥사(辛巳獄事)를 거치면서 세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이러자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였다. 그러나 소론계와 남인의 강한 반대가 있고, 노론의 권상유(權尙游), 박치원(朴致遠) 등 일부세력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노론은 1721년(경종 1)에서 1722년(경종 2)에 걸친 신임옥사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1724년(경종 4)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에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귀양을 가 있던 민진원(閔鎭遠)을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일경(金一鏡), 유봉휘(柳鳳輝), 최석항(崔錫恒) 등을 비난하는 상소가 잇달았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김일경을 유배보내고, 신임옥사를 일으킨 목호룡(睦虎龍)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노론계인 민진원, 정호(鄭澔), 이관명(李觀命)을 재상에 임명하였으며, 신임옥사는 무옥(誣獄)이라고 판정하여 피해자를 신원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노론이 중앙정치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해졌다. 게다가 영조가 노론계 인물을 중용함에 따라 소론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1725년(영조 1) 김일경이 제거되자 마침내 소론의 일부 세력은 무신당을 결성하였다. 무신당은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등이 주도하였고, 이들은 남인계 인물인 한세홍(韓世弘)과 이인좌(李麟佐) 등을 포섭하였다. 이들은 노론과 영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론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정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무신당은 영조의 왕위계승의 부당함을 선전하였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외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면, 경중에서 내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같은 무신당의 전략은 당시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인좌(李麟佐)와 정세윤(鄭世胤)의 역할에 기대한 것이다. 이인좌는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 당시 관직 진출이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박필현(朴弼顯) 등과 반란을 계획하였고, 안성의 이호, 과천의 이일좌(李日佐), 거창의 정희량(鄭希亮), 충주의 민원보(閔元普)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남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영남의 유명 사족과도 접촉하였다. 이로써 이인좌는 경기, 호서, 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세윤은 1724년(영조 즉위년)에 600~700여명의 유민을 기반으로 녹림당을 결성하여 나주의 나숭대(羅崇大)와도 결탁하였다. 무신당은 녹림당을 주력부대로 삼을 계획이었고, 이의 지휘권을 이인좌에게 맡겼다. 그러나 무신당의 반란계획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단행되어 노론정권이 퇴진하면서 차질이 발생하였다. 영조와 노론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무신당은 영조가 소론과 남인의 일부세력을 등용함에 따라 내부적인 분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박필현, 한세홍, 이유익 등 중앙에서 추진한 반란계획은 일시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에서 반란 계획이 유보된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이인좌와 정세윤을 중심으로 반란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인좌는 영남사족의 반노론(反老論) 성향이 강하니, 반란을 계획하면 영남사족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안동과 상주는 정홍수(鄭弘壽)에게, 거창과 안음은 정희량에게 반란 준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경기지역을 담당하였다. 한편 이호와 정세윤은 호남에서 반란을 준비하였다. 이호는 나만치(羅晩致)를 통해 나주의 나숭대를 만나, 태인현감 박필현과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이 반란을 준비 중이니, 합세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세윤은 부안의 성득하(成得夏)와 김수종(金守宗)을 만나 반란에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고, 조총 수백 정을 은밀히 마련하여 녹림당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에서 반란준비가 진행되자, 중앙에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의 지도층은 당시 평안병사로 나가있던 이사성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고, 태인에 있던 박필현도 무신당의 일원인 담양부사 심유현(沈維賢), 무장에 유배와 있던 박필몽(朴弼夢) 등과 반란을 준비하였다. 특히 박필현과 심유현은 관군을 훈련시키고, 담양에서 화약을 훔쳐 한양으로 운반하여 반란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박필현은 고부의 송하(宋賀), 부안의 김수종(金守宗), 순창의 양익태(梁益泰) 등 지역유지와 결탁하여, 전주와 남원의 시장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괘서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안, 고부, 순창 등의 지역유지와 녹림당이 박필현 등과 결탁하면서, 이들의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방의 반란 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자, 중앙의 지도층도 군대와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안의 노비 등을 동원하거나 돈을 지급하고 고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군의 별장을 지내고 있던 이사주(李思周)가 관군을 동원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중앙에서 반란군을 모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괘서를 뿌리고 암살단을 결성하였으며,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사를 요청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반란 준비가 진행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앙은 4월에 반란을 계획 중이었으나, 지방에서는 3월 초순부터 이인좌, 정세윤 등이 경기도 양성, 진위 등에서 군사를 모아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신당은 중앙과 지방 간에 거사시기에 일정한 차이를 두고 반란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순에 안성, 평택, 양성, 괴산의 집결지에서 양반과 기병 50여 명을 포함한 약 300여 명의 군사가 모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모인 반군은 병기가 부족하여 전력이 보잘 것 없었다. 그러다가 소사평으로 이동하여 군기와 말을 보충하고 전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반군은 가천역에서 말을 탈취하기도 하였고, 각처의 부민(富民)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수물자와 군량 확보, 군사 모집을 위해 반군은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전라병사 조경[후기](趙儆) 등이 반군에 동참한다는 정치선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선전이 큰 효과가 있어, 반군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확산되었고, 경기도 남부와 호서 일부지역에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사에 있던 반군이 청주(淸州)성을 점령하면서 반군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청주의 군관과 향임층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반군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반군의 세력은 황간, 회인, 목천, 진천 등지로 확대되었다. 반군은 이들 지역에 수령을 파견하였고, 환곡을 나누어 주고 군사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200~300명으로 시작한 청주성 점령은 각처, 각층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한편, 경기도와 호서의 반군이 청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영남과 호남세력이 동조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동조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3월 12일 안동에 도착한 이웅보(李熊輔) 등은 이인좌의 지시에 따라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지역민의 비협조로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자 이웅보는 안음, 거창으로 이동하여 병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지역의 반군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전라도 역시 태인현감 박필현이 인근의 지역유지와 거병을 하기로 하였지만, 고부 토호 송하는 괘서 살포에는 동참하였지만 군사 동원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박필현이 관군을 동원하여 전주의 감영군과 합세하여 청주로 진격하는 계획 역시 사전에 탄로되었다. 또한 무장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은 30여 명의 군사로 전주에 입성하고자 하였으나, 태인에서의 군사 동원이 실패하자 해산하였다. 결국 거사 이전의 계획과 준비대로 호남에서의 군사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호남과 영남의 반군 동원이 수월치 않자, 평안병사 이사성도 사전의 약속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과 지방이 연계한다는 무신당의 반란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청주성의 반군은 도성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부는 반군이 양성, 소사 등지에서 집결하던 중에 최규서(崔奎瑞)가 보고를 올림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반군이 연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먼저 성문의 방어를 강화시켰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여러 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반란 동조세력인 윤휴(尹鑴), 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중에서 한양 거주자와, 김일경과 목호룡 등의 가족을 체포하였다. 또한 반란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이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한강 인근에 보관한 세곡을 성안으로 운반시켰다. 한양 도성의 안전을 확보한 이후, 정부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대장으로 하여 반군 진압을 시작하였다. 관군은 3월 24일 반군의 주력부대와 안성·죽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안성·죽산전투에서 관군은 반군을 제압하였고, 이인좌, 권서봉(權瑞鳳), 목함경(睦涵敬) 등 반군의 지도자를 생포하였다. 주력 부대가 관군에게 패배하고, 지도자까지 생포된 상황에서 반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게다가 반군을 소탕하는 민병대가 결성되어 반군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추풍령(秋風嶺)을 넘었을 때 이미 영남의 반군은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에 개선하였고, 영조는 숭례문에 나가 오명항을 친히 영접하였다.

한 때 청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를 과시했던 반군의 반정계획은 안성·죽산전투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다. 주도층간의 갈등, 정미환국을 통한 중앙지도층의 반란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통일된 준비체계의 부재 등으로 인해 ‘이인좌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이인좌의 난’은 정국 방향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소론 세력은 반란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노론 역시 반란을 유발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만은 아니었다. 반면에 붕당간의 반목과 갈등을 비판한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탕평파는 노론의 온건파인 홍치중(洪致中), 김흥경(金興慶)의 협조를 얻어, 노론·소론의 온건파와 함께 정국을 운영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노론과 소론 온건파에 의한 탕평정권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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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영조 즉위 직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연합하고 이인좌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사건.

[개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1728]가 대원수가 되어 반란을 지휘하였고, 반란군은 충청도 청주를 점령하면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청주에서 가까운 목천에 머물며 병사를 모았다. 목천은 남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으므로 반란에 호응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반군은 목천을 지나 안성과 죽산에 이르렀지만 이곳에서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호남과 영남의 반군 역시 궤멸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경종은 세자 때부터 병약하여 국사 처리에 어려움이 많았고, 숙종은 이를 우려해 이이명(李頤命)과 정유독대(丁酉獨對)[1717년]를 통해 후에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부탁하였다. 경종 초기에 연잉군이 세제 책봉(世弟冊封)되고 세제 대리청정까지 하게 되자 소론측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들어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년에 일어나 1722년에 대옥으로 끝났다는 의미에서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함]를 일으키고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경종이 재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여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됨으로써 소론은 배척당하고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이에 소론에서는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725년(영조 1)부터 소론은 세력을 결집해 나가며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소현 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전국 각지의 소론계 인물이 이에 호응하며 흉서와 괘서 사건을 일으키고, 가정(家丁)·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募軍)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경과]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가 기용되면서 반란 모의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등용된 이들이 반란 세력의 동태를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반란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반군은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들어와 청주의 충청 병영을 급습하여 충청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등 관리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목사와 병사를 세운 후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병마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여 청주를 장악한 다음 주변 고을인 목천과 청안, 진천을 통과해 안성, 죽산으로 진군하였다.

청주 반군이 안성으로 향하면서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 목천이었다. 목천 현감 윤취은(尹就殷)은 3월 15일 관문을 닫고 이미 도주한 상태였고 반군은 가짜 목천 현감에 곽장(郭章)을 임명하여, 목천 향소(鄕所)를 중심으로 군사와 군마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고 향소에 모인 군사들이 출발 즈음 사정을 알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목천은 이황의 제자인 영남의 거유 정구(鄭逑)를 제향한 도동 서원(道東書院)이 소재할 만큼 충청 지역에서는 드물게 남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도동 서원에 제향된 정구는 말년에 목천 번자울에서 우거하며 목천의 선비들과 죽림 정사(竹林亭舍)를 세워 강학 활동을 하였으며, 남인 김일손(金日孫) 역시 처향인 목천에 거주하고 있었고, 정구의 제자 황종해(黃宗海)는 목천이 가향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목천은 남인 계통의 사족들이 활약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반군이 모병 지역으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안성과 죽산으로 진격한 반군은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이 사이에 청주 역시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결과]

이인좌의 난 에는 청주 주변의 고을 외에도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반군은 충청도 반군과 합류하려다 실패하였고, 전라도의 반군은 주모자가 체포됨으로써 반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영조는 도성 문을 폐쇄하고 도성 밖 관군을 동원해 서울을 방비하면서, 토벌군을 보내 반군을 소탕하였다. 반란 세력을 평정한 관군이 4월 19일 개선하자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인좌의 난 원인과 결과

이인좌의 난 원인과 결과

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숙종(제19대 왕, 1661~1720, 재위 1674~1720)은 노론의 수장 이이명을 불러 독대한 후(정유독대) 세자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명하고 자신은 요양할 것을 밝힙니다. 숙종(재위 1674~1720)이 승하하자 경종(1688~1724, 재위 1720~1724)은 대리청정을 마치고 33세의 나이에 소론의 지지를 받아 조선의 제20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노론은 경종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합니다.

노론은 권력을 잡기 위해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나 소론의 반발로 대리청정은 취소됩니다. 대리청정을 주창한 이이명은 유배를 갔다가 사사되고,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은 숙청을 당하는 신임사화(1721 경종 1~1722 경종 2)로 이어져 노론 세력은 약화됩니다(신축옥사). ​

정권은 소론에게 완전히 넘어갔지만 병석에 누워 지내던 경종이 재위 4년 2개월 만에 죽음으로써 이복동생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가 즉위합니다. 영조는 즉위 후에 신축옥사를 이유로 소론을 배척하고 다시 노론이 집권하게 됩니다. 정권에서 소외가 된 소론과 갑술환국으로 몰락한 남인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무력으로 제거하려는 반란을 준비합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소론의 이인좌입니다. 이인좌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라 칭하며 1728년 (영조 4) 3월 15일에 장례 행렬로 위장해 관 속에 무기를 넣고 청주성에 들어가 성을 함락시키고 충청도 일부 지역, 경상도 거창, 함양 등을 장악합니다. 경종의 죽음은 병사가 아닌 영조와 노론 세력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는 격문을 돌리며 명분을 만들고 병사를 모집하며 안성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도원수 오명항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고 이인좌는 대역죄로 능지처참됩니다.(이인좌의 난, 1728) 그리고 밀풍군 이탄은 자결을 명받습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소론과 남인 급진 세력은 몰락합니다. 영조는 자기들만의 이익을 쫓는 붕당 간의 폐해가 심해지자 이를 억누르고자 노론과 소론이 골고루 참여할 수 있는 탕평책을 추진하여 왕권을 안정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인 탕평파를 만듭니다. 하지만 영조는 붕당 정치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합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이들의 대립을 막았을 뿐이었습니다. 소론은 정치적 성향을 함께 했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조정은 영조의 신임을 얻던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며 운영해갑니다.

영조의 위기극복 리더십 연구: ‘이인좌의 난’ 사례를 중심으로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15일부터 3월 28일까지 약 보름간 진행된 전국적인 반란으로,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영조 정권에게 큰 타격이자 도전이었다. 이인좌, 박필현, 정희량 등 비(非)노론계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이 반란은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과 ‘경종독살설’을 등에 업고 충청도와 경기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장악해 갔다. 하지만 오명항 등 관군 지휘부의 주도면밀한 대응과 영조 정권의 적극적인 소통 및 정보통제로 애초 목표였던 지역별 연대를 통한 반정(反正)까지 나가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이 논문은 그 동안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되, 기존 연구와 달리 주로 국왕 영조의 관점에서 반란이라는 중대한 위기를 극복해 가는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영조는 반란 발발 소식을 듣고 초기에는 반군의 주동자와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오광운, 오명응과 같은 비(非)노론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대응을 해 나갔다. 특히 반란군과 같은 당파(소론)이며친분관계에 있었던 오명항 등을 중용하는 모험을 했는데, 오명항·박문수 등은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반군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둘째, 영조는 반란이 진행되는동안 여러 차례 난의 발생 원인이 조정의 잘못, 즉 붕당의 폐단에 있음을 언급하면서, 난진압 후 초당파적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과, 온 나라가 한 동포와 같이 화합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가겠다는 정치비전을 제시했다. 바로 그러한 영조의 인재경영과 비전 제시가 이인좌의 난이라는 중차대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게 했다.

Lee In-jwa’s Rebellion was one of the most dangerous crises in King Yeong-jo’s regime. The Rebellion was raised by prestigious families such as Lee In-jwa (Yoon Hue’s grandsonin-law), Jeong Hee-ryang (Jeong-on’s descendant), and Jeong Se-yoon (Jeong In-ji’s descendant). They broke out rebellion in the middle and southern areas Korea: ChungChong-do,Kyungsang-do, and Jeolla-do simultaneously. How King Yeong-jo had overcome it? First, he had an adventure which he placed full confidence in his subjects like Oh Kwang-wun [NamIn], Oh Myung-hang [SoRon], and Park Mun-su[SoRon] who could had been his political rivals. Second, he diagnosed in early stage cause of rebellion as the severe political cleavage. He, thus, suggested Grand Harmony policy [Tang Pyong Policy] as a new solution. He promised that he would appoint personnel to positions according to their ability, not the political background. He had tried to inform his new political vision to his people through translating into Korean Alphabet version in every corner of the land. After 15 days he had overcome the rebellion successfully and turned the crisis to chance as a result.

[세상만사]이인좌의 난과 어사 박문수

[세상만사]이인좌의 난과 어사 박문수

김태원 객원기자

영조의 즉위 전 이야기부터 그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국왕의 자리를 지키는 이야기를 담은 역사드라마 ‘대박’이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작가가 역사를 기초로 한 창작 드라마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시대의 역사를 너무 폄하시키고 왜곡되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보는 내내 거북스러웠다.허구의 인물인 백대길이라는 주인공 설정부터 시작해서 한나라의 국왕인 숙종이나 영조를 시정잡배들과 노름이나 하는 파락호로 전락시키고, 동네 노름꾼에 불과한 백대길을 조선왕조 역모 사건 중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인물로 둔갑시키는 작가나 연출가의 의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시청자를 조선왕조 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우습게 생각하는 것인지,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역사관을 바꾸려는 것인지 알고 싶다. 시청자들의 보는 재미를 위해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전개하기 위해 대사를 맛깔나게 쓰거나 주변 등장인물을 극 중 상황에 맞게 설정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하지만 극의 틀 자체를 다르게 한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이인좌의 난은 엄연히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이며 난을 평정한 인물들이 공신으로 기록되어 그들의 공적이 후세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사람은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한과 우리가 조선 최고의 암행어사로 알고 있는 박문수다. 영조 4년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박문수는 오명한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관군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박문수는 반란의 무리를 소탕하고 적의 우두머리인 이인좌 등을 잡아들여 죄를 물었고, 또한 정희량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남은 잔당을 소탕하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 일로 박문수에게는 분무공신 2등 영성군으로 봉해졌다. 그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공신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분무공신 말 그대로 용맹을 떨친 공신이다. 이렇듯 난을 평정한 사람은 따로 있건만 듣도 보도 못한 백대길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서 다른 이의 공적을 가로채는 상식 밖의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무책임한 행동을 시청자를 상대로 벌인 것이다. 드라마 마지막 부분에서 대길이 평민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 이 또한 난이 평정된 후 박문수가 경상도 관찰사(도지사)가 되어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며 어루만지고 또한 믿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는 사실과 비슷하다.박문수의 죽음에 대해 영조는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중에 비록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박문수)과 같음이 있으랴?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보니,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아! 무신년에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우참찬에 그치고 말 것인가?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하여 나의 옛날의 공을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이 실록을 기초로 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친일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만 역사가 왜곡됐다고 흥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안방에 들어와 있는 역사 왜곡에도 냉정한 사고와 판단 그리고 질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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